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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ture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 - Thomas Mann, Deutschland 1912

by 토마스 만 2020.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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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 - Thomas Mann, Deutschland 1912

1장


이런 몽환적인 상태에서 서서히 깨어나던 중에 문득 넓은 계단을 양쪽에서 지키고 선 묵시록적인 동물상 위쪽 주랑에서 한 남자를 발견했다. 평범하지 않은 그 모습이 아센바흐의 생각을 완전히 다른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훌쩍 떠나고 싶은 욕구였다.

그런데 그 욕구는 실제로 발작처럼 일어나더니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다가 급기야 환각 상태로 고조되었다.

 

그는 최소한 돈에 구애되지 않고 세계적인 교통수단의 이점을 마음껏 누릴 경제력을 가지면서부터, 여행이란 그럴 마음이 없는데도 이따금 꼭 취해야 할 위생 조치와 비슷한 것이라고 여겼다.


자아와 유럽의 영혼이 부여한 과제들로 너무 바쁘기도 하고, 창작의 의무감에 짓눌리기도 하고, 또 다채로운 세상을 즐기기에는 원래 그런 기분 전환 같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셩격인 탓에 그는 자신의 생활 반경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세계 내에서 얻을 수 있는 생각과 견해들에 전적으로 만족하며 살아왔다.

 

그는 그 대목을 재차 검토하면서 막힌 곳을 뚫거나 해체해 보려 했다.

그러나 곧 몸서리치는 반감과 함께 그 공격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 작업에 특별한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 다듬어도 결코 만족할 상태에 이르지 못할 거라는 원천적인 불만에서 기인한 반감이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런 불만은 젊은 시절부터 그가 가진 재능의 본질이자 지극히 내밀한 본성이었다.

그가 그동안 감정을 가혹할 정도로 억누르고 차갑게 식힌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일을 즐겁게 대충 처리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완성해도 그냥 넘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2장

 

직분에 충직한 냉철한 꼼꼼함과 약간 어둡고도 불같은 충동의 결합이 한 예술가, 그것도 아주 특별한 예술가를 낳았다.

언젠가 아센바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직접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위대한 것은 '그럼에도'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위대한 것은 걱정과 고통, 가난, 버림받음, 육체적 쇠약, 악덕, 정염, 수많은 장애를 넘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소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체험이었고, 그의 삶과 명예의 공식이자, 그의 작품으로 들어가는 열쇠였다.

 

 

3장

문득 충격적이면서도 지극히 당연하게 목적지가 불쑥 눈앞에 떠올랐다.
하룻밤 사이에 동화 같은 기상천외한 일탈을 경험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답은 명백했다.
그런데도 여기서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길을 잘못 든 것이다.

 

그중에도 유독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순간 아센바흐는 깜짝 놀랐다.
청년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그냥 젊지 않은 게 아니라 누가 봐도 늙은이였다.
아센바흐는 소름 끼치는 기분으로 그와 그 친구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저들은 그가 늙은이인지 모르는 것일까?

 

그는 꼭 그럴 거라 믿었다.

이 도시는 늘 환한 광채 속에서 그를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과 바다는 여전히 우중충하고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말 없고 고독한 자가 관찰하고 맞닥뜨리는 것은 사교적인 자에 비해 한층 모호하고 강렬할 뿐 아니라 그 생각은 한층 무겁고 괴팍하며 항상 슬픈 빛을 띤다.

그래서 한 번의 눈길이나 웃음, 의견 교환으로 쉽게 떨쳐 버릴 수 있을 느낌과 심상도 그런 사람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신경이 쓰이고, 침묵 속에서 점점 깊어지고, 의미심장한 체험과 모험과 감정이 된다.

 

작은 등나무 테이블 둘레에 아직 장성하지 않은 아이들이 가정교사 혹은 인솔자로 보이는 여자의 보호 아래 모여 앉아 있었다. 열다섯에서 열일곱 살쯤으로 보이는 처자 셋과 열넷쯤 된 긴 머리 소년 하나였다.

아센바흐는 소년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완벽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것이다.

 

유리문을 통해 들어온 소년은 조용히 홀을 가로질러 누이들의 테이블로 향했다.
걸음걸이는 상체 자세뿐 아니라 무릎 움직임과 흰 신을 신은 발의 내딛는 동작에까지 비범한 우아함이 배어 있었고, 무척 경쾌했으며, 연약하면서도 자부심이 가득했고, 또 도중에 두 번이나 홀 안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들었다가 내리까는 아이다운 수줍음으로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소년의 옆얼굴이 정확히 관찰하는 자의 정면으로 돌려지는 순간 아센바흐는 재차 깜짝 놀랐다.
아니, 그냥 놀란 정도가 아니라 신과 비슷할 정도의 완벽한 아름다움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센바흐가 보기에 소년은 무척 병약한 것 같았다.

어쩌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아센바흐는 이런 생각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만족감이나 안도감이 들었는데,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굳이 스스로에게 해명하려고 들지 않았다.

 

 

4장

작가의 행복은 온전한 감정이 될 수 있는 생각과 온전한 생각이 될 수 있는 감정에 있다.
당시 고독한 작가는 그런 가슴 뛰는 생각과 엄밀한 감정을 갖고 있었고, 그 생각과 감정에 순순히 따랐다.

 

눈으로만 아는 사람들끼리의 관계만큼 야릇하고 미묘한 것이 없다.
사람은 상대를 평가 내릴 수 없을 때는 일단 사랑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리움은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생겨난다.

 

소년의 이 귀한 출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 그 사건이 일어났다. 타지오가 미소를 지은 것이다.
그를 향해 말하듯이, 친숙하게, 고혹적으로, 거리낌 없이.
이 미소를 받은 자는 불길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황급히 자리를 떴다.
어찌나 충격이 심하던지 테라스와 앞뜰의 불빛을 피해 뒤쪽 어두운 공원으로 서둘러 도망쳤다.
그의 입에서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다정스러운 충고가 야릇하게 새어 나왔다.
"넌 그렇게 웃어선 안 돼! 잘 들어. 누구에게도 그렇게 웃어선 안 돼!"

 

 

5장

 

"세상이 알면 안 되겠지!"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드는 동시에 그의 가슴속에는 지금 외부 세상이 빨려 들고 있는 이 위험한 모험에 대한 기대감도 일었다. 범죄가 일상의 안정된 질서와 안녕과는 어울리지 않듯, 열정도 사회조직의 이완이나 세계의 혼란, 시련을 두 손 들고 환영하기 때문이다.

 

급습을 당해 악마의 손아귀에 무기력하게 붙잡혀 있던 아센바흐는 녹초가 된 상태로 이 꿈에서 깨어났다.

 

어쨌든 타지오도 남았다.

그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던 아센바흐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자신들을 방해하는 생명들이 도주와 죽음으로 모두 제거되어 그와 미소년 단둘만이 이 섬에 남게 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으레 그러듯 그도 상대의 마음에 들고 싶어 했고, 그게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극심한 불안을 느꼈다. 그는 양복에 젊고 밝게 보이는 액세서리르 달고 향수를 뿌렸다.
하루에도 여러번 많은 시간을 들여 몸을 치장하고 화장을 한 다음 흥분하고 긴장된 심정으로식당 홀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를 매혹시킨 그 달콤한 미소년의 얼굴을 볼 때면 늙어 가는 자신의 몸뚱이가 역겨웠고, 자신의 허옇게 센 머리와 날카로운 얼굴선을 볼 때면 솟구치는 수치심과 절망감을 막을 수가 없었다.

 

황홀감으로 얼떨떨해진 노작가는 꿈에 취한 듯 행복하고 혼란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이발소를 나왔다.
넥타이는 빨간색이었고, 챙이 넓은 밀짚모자에는 알록달록한 리본이 둘러져 있었다.

 

타지오는 물가에 서서 머리를 숙인 채 젖은 모래 위에 발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별안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아니면 무슨 충동이 솟았는지, 한 손을 허리에 올린 채 상체를 돌렸다.
다리를 움직이지 않은 채 상체만 움직인 아름다운 회전이었다.

소년은 어깨 너머로 물가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소년을 지켜보는 자가 앉아 있었다.
처음으로 소년의 아련한 회색 눈이 경계를 넘어와 그의 눈과 마주쳤던 그 때처럼.

그 전까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저기 바깥에서 걸어가는 소년의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움직이던 아센바흐의 머리가
이제 소년의 시선을 맞이하기라도 하듯 살짝 들렸다.
그러더니 가슴 위로 툭 떨어졌다.


그 바람에 그는 밑에서 위로 눈을 치켜든 것처럼 보였고, 힘없이 내면으로 가라앉은 표정이 깊은 잠에 빠진 사람 같았다.
그러나 정작 그가 보기엔, 창백하고 사랑스러운 '영혼의 인도자'가 저 바깥에서 미소 지으며 손짓하는 것 같았고, 마치 그 인도자가 허리에서 손을 떼어 저 먼 곳을 가리키며 광대한 약속의 땅으로 먼저 둥둥 떠가는 듯했다.
그래서 그전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그도 인도자를 따라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


거대한 끌림에 의해
억제되었던 감정은 길을 잃었고
상반된 것과 함께 상쇄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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