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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ture

타락 (Gefallen) - Thomas Mann, Deutschland 1894

by 토마스 만 2020.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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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Gefallen) - Thomas Mann, Deutschland 1894

 

또다시 우리 넷만 모였다.
그곳은 아주 독특한 양식으로 꾸며진 야릇한 공간이었다.

 

라우베는 젤텐 박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만일 남녀가 서로 사랑하다가 남자 쪽이 여자 몸을 망쳐도 남자는 예전과 똑같이 건실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어요.
망할 놈, 그런데 여자는 어떻습니까? 타락한 인간 취급을 받아요. 말이 됩니까?
그리 보자면 남자는 타락한 게 아닙니까?"

나는 젤텐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조용했다.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자네들한테 이야기를 하나 해 주지. 단편소설 형태로 막 끝냈거든.

자네들도 알지? 내가 그런 글을 좀 긁적거린다는 걸.

 

내 이야기의 주인공은 북부 독일의 작은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아홉엔가 스무살엔가 P 대학에 진학했어.
그는 아주 괜찮은 녀석이었어. 처녀들이 모두 그에게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냈어.
더구나 순수하기까지 했어. 몸과 마음이 모두 순결했지.

 

그도 자연스레 사랑에 빠졌어.

술집 급사한테 빠진게 아니라 젊은 연극배우 벨트너 양한테 빠졌어.
괴테가 탁월하게 지적한 것처럼, 남자들의 몸속에는 청춘의 묘약이 있어서 모든 여자가 헬레나처럼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여자는 정말 예뻤어.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가 맨 먼저 한 일은 시를 쓰는 것이었어.

독일적인 '고요한 서정시' 였지.
그는 밤늦게까지 책들 틈에 앉아 시를 쓸 때가 많았어.
하지만 한심한 짓이었어. 누구든 비웃을 게 분명했어.

그는 갑자기 홱 돌아누워 얼굴을 베개에 파묻더니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흐느껴 울기 시작했어.


창가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자리에서 일어났어.
방금 책을 보던 중이었는지 테이블 위에는 밀쳐 둔 책이 있었지.
그런데 아, 어쩌면 그렇게 매혹적일 수 있을까!

그녀가 여기 있어! 내 사랑이! 내가 그녀 옆에 있다고!

 

'지금 몇 시인데 벌써 가시려고요?'

그녀가 슬프고도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어.
이것은 비록 연기라고 하더라도 무대 위에서 하는 것보다 훨씬 사실적이고 설득력이 있어 보였어.

 

그는 정말 모든 것과 결별했어.
시간이야 어떻게 지나가든, 항상 그녀의 발치에 누워 고개를 젖힌 채 그녀의 숨결을 들이마실 수만 있다면 그만이었어.
방금 언급한, 그가 그녀의 발치에 누워 있다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특징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어.
상대의 마음에 들려는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상대의 비위를 맞추려고 늘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쪽은 언제나 그였어.
분명 헌신적인 사랑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사회적 약자라는 점이 더 크게 작용해서, 그는 그녀에게 야단맞는 것을 기꺼이 감수했고, 그런 다음에야 굴욕적이고 애처롭게 용서를 구한 뒤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을 수 있었어.
정말 그는 발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았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갔어.
그녀의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었지.

변덕이 심한 여자였거든.

 

그녀의 집 앞에 멈추어 서서는 한동안 라일락 향을 마셨어.

 

그는 '안녕, 이르마!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깜짝 놀랐지, 하고 말하려다가 오히려 놀란 것은 그 자신이었어.
그가 들어서는 순간 그녀가 용수철에서 튀어 오르듯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았어.
마치 무언가 급히 가지러 가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어.

그녀는 그 상태로 가만히 서서 동그랗게 뜬 눈으로 이상하게 그를 바라보더니 어찌할 줄을 모르고 냅킨으로 입을 닦는 시늉을 했어.
맞은편에는 기품 있는 노신사가 앉아 있었어.

'그래, 난 배우야. 그런데 무슨 헛소리야?'

 

이윽고 그는 자기 방 책상에 조용하고 힘없이 앉아 있었어."

젤텐 박사가 이렇게 말하며 참담하고 슬픈 표정으로 라일락을 잔인하게 움켜쥐던 모습은 실제로 당시와 똑같아 보였다.

 

 

 

...

 

사랑에 있어서의

강자와 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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