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 크뢰거 (Tonio Kröger) - Thomas Mann, Deutschland 1903
토니오는 입을 다물었다.
눈빛이 어두워졌다.
한스는 오늘 점심에 같이 산책하기로 한 걸 잊고 있다가 이제 다시 떠올린 게 분명했다.
토니오 자신은 이 약속을 한 뒤로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이 순간만 손꼽아 기다려 오지 않았던가!
토니오게게 자작시를 적은 공책이 있다는 사실이 본인의 실수로 알려지면서 학우와 교사들은 그를 좋지 않게 생각했다.
남들의 이런 반응에대해 토니오는 화를 내는 것이 바보 같고 저급하게 여겨져, 그렇게 대응하지는 않고 오히려 학우와 교사들을 경멸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지 않아도 평소에 매너리즘에 빠진 그들의 사고방식을 역겨워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 약점을 신통하게도 훤히 꿰뚤어 보던 그였다.
왜 나는 이런 별종으로 생겨 먹어서 늘 모든 것과 부딪치고, 선생님들과 사이가 않 좋고, 다른 친구들과 있으면 어색한 것일까?
친구들을 봐! 얼마나 선하고 평범해?
걔들은 선생님을 우습게 여기지도 않고, 시를 쓰지도 않고, 누구나 똑같이 생각하는 것만 생각하고, 누구나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해!
질투심의 고통, 실망의 고통 그리고 정신적으로 함께하기를 바라는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고통이었다.
어쩌면 이런 고통은 당연할지 몰랐다.
토니오는 한스의 생활 방식을 부러워하면서도 희한하게 끊임없이 한스를 자기 세계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해야 잠시만 성공할 수 있었고, 그것도 겉으로만 그렇게 비쳤을 뿐이다.
둘이 있을 때는 한스가 자신을 약간 좋아한다는 것을 토니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삼자만 끼면 토니오와 함께 있는 것을 창피해하면서 그를 제물로 삼았다.
그로써 토니오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토니오 생각에, 그는 정말 어이없는 원숭이 같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쾌활한 잉게 홀름은 넋이 나간 듯한 미소를 지으며 크나크 씨의 몸동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의 눈이 그렇게 차분하고 동요가 없을 수 있을까!
그의 두 눈은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다시 말해 복잡하게 감정이 얽혀있고 슬픔이 깃들어 있는 곳까지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 그처럼 걸으려면 어리석어야 했다.
그래야 사랑받을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토니오는 살롱을 몰래 빠져나와 복도로 나가더니 블라인드가 쳐진 창문 앞에 뒷짐을 지고 섰다.
그는 지금 밖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내면에는 원망과 그리움이 그득했다.
그는 왜, 왜 여기 있는가?
그 방의 창가에 앉아 슈토름의 <이멘 호>를 읽으며 이따금 늙은 호두나무 가지가 묵직하게 삐걱거리는 저녁 정원을 내다보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걸핏하면 넘어지는 막달레나는 그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와 함께 웃고 그와 대화를 나눈반면에 금발의 잉게는 옆에 있어도 저 멀리 낯선 곳에 있는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져 가슴 아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잉게와의 사이에 그런 장벽이 있는 것은 서로 언어가 달랐기 때문이다.
토니오는 차갑게 식어 버린 제단 앞에 얼마간 서 있었다.
이 세상에서 변치 않는 마음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충격과 실망감으로 가득 찬 채.
그러다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기 길을 떠났다.
토니오는 약간 건들거리면서 고르지 않은 걸음걸이로, 휘파람을 불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먼 곳을 바라보며 자기 길을 걸었다. 길을 잘못 든다면 그것은 일부 사람들에겐 올바른 길이 하나만 있을 수 없기에 생기는 일이었다.
이런 인식의 고통과 자부심과 더불어 고독이 찾아왔다.
그 입장에서도 쾌활하지만 감각이 무딘 천진한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이 편치 않았고, 사람들 입장에서도 그의 이마에 찍힌 독특한 표식이 당혹스러웠다.
건강이 약해지는 만큼이나 예술가적 본능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까다롭고 고급스럽고 정선되고 섬세해지고, 진부한 것에 민감해지고, 미적 감각과 감수성의 문제에 극도로 예민해졌다.
그는 이렇게 숨어서 세상과 담을 쌓고 말없이 일만 했고, 예술적 재능을 사교적인 장식물로 여기는 소인배들을 경멸했다.
"하고 싶은 얘기 다 했어요?"
"아뇨, 하지만 그만하겠소."
"그래요, 그 정도면 충분하죠. 내 대답을 기다리세요?"
"해 줄 말이라도 있소?"
"누가 뭐라고 하든 여기 앉아 있는 당신도 한 사람의 시민이라는 사실이 그 해답이에요. 당신은 길을 잘못 든 시민이에요. 길 잃은 시민이라고요."
"물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갈 생각이에요? 경로 말이에요."
"통상적인 길로 가지 않겠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눈에 띄게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가 살며시 웃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 그거였어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가 접어든 방향은 슬프고도 희한에 찬 간밤의 꿈들과 관련이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시장으로 향했다.
곧 뾰족하게 치솟은 고딕식 분수가 여러 개 있는 시장 광장이 나타났다.
거기서 그는 어느 집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는 이 집을 하염없이 바라보더니 문 옆에 붙은 문패를 읽고, 창문 하나하나를 눈으로 더듬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린덴플라츠 광장에 이르자 한 예쁘장한 빌라 앞에 걸음을 멈춘 뒤 한참 동안 정원과 창문을 살펴보고는 마지막으로 정원 문을 빙그르르 돌려 보았다. 그런 다음 차가워지고 녹 묻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등을 돌렸다.
그는 자신이 참가하지도 않은 댄스파티의 열기에 도취되어 있었다.
질투심으로 지치기도 했다.
그는 후회와 향수로 울었다.
"시민들은 어리석소.
하지만 나를 감동도 동경도 없는 인간으로 여기는, 미를 숭배하는 당신 같은 예술가들은 이걸 알아야 하오.
운명적으로 생겨 먹길, 일상의 환희에 대한 동경보다 더 감미롭고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오.
작가를 정말 작가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 살아 있는 것, 평범한 것에 대한 시민적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
고통스런 내면의 갈등을
꿰뚫고 바라보도록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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